죽은 나를 발견하라

언젠가 올림픽에 출전한 금메달리스트 중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다. 이 선수는 경기에 출전 하기 위해 경기장에 들어 올 때부터 두 손을 들어 하나님을 높이며 입장했다. 그리고 그는 결승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금메달을 획득한 후 한참 동안이나 두 손을 높이 올려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 드렸다. 경기를 마친 후, 기자들이 “어떻게 선전을 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을 했다. “먼저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지난번 올림픽 때는 죽기 살기로 경기를 해서 졌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죽기로 경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겼습니다.”

그렇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아직도 죽기 살기로 살기 때문이며, 죽기 살기로 예수를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2천 년 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안 죽고 살아있다. 그래서 속상하고, 짜증나고, 절망하고, 걱정하고, 우울하고, 미워하고, 원수 맺고, 온갖 탐욕과 정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아가 죽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핵심 복음인줄 잘 모르는 것 같다. 자아가 죽는 것, 즉 내가 죽는다는 것은, 복음의 핵심인 동시에 복음의 최고봉이다. 주님도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마16:24)고 말씀하지 않으셨나.

내가 죽으면 다 끝나는데, 내가 죽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속상하거나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데, 왜 못 죽을까?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 기도할 때 마다 “나를 죽여 달라.”고 간청한다. 그런 기도가 어디 있나? 이미 죽었는데, 이미 주님이 다 죽여주셨는데, 뭘 또 죽여 달라고 하는가? 우리의 할 일은 그저 이미 죽은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돌아서면 낙심하고 염려하고 좌절하는가? 안 죽어서 그렇다. 덜 죽어서 그렇다.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어서 그렇다. 어느 금메달리스트처럼 죽기로 하고 살아 보자.

죽음을 선포하고 예수를 바라보자. 기막힌 웅덩이와, 깊은 수렁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죽자. 아니, 이미 죽었음을 깨닫자. 그것이 은혜다.

이미 죽은 자는 상황과 환경과 형편을 초월한다. 오직 나는 죽고 주님이 살면 그만이다. 그러면 주님이 살려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