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아침에

언제나 변함없으리라던 주님을 향한 나의 열정이, 목회라는 현실을 걸어오면서 나도 모르게 점점 식어지고 있음을 바라보며 내내 두려움과 죄스러움에 잠긴다. 목사안수를 받을 때 소명과 사명감에 주님을 위하여 죽겠노라고 맹세하던 얄팍한 나의 입술이 가증스럽게까지 느껴진다.

이렇게 나의 마음이 가라앉고 식어져만 갈 때, 나는 저 검푸른 지중해의 쓸쓸한 지하 감방에 갇혀 있던 바울과 실라를 생각한다. “예수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다가 체포되어 바람도 통하지 않는 깊숙한 지하 감방에 갇힌 채 손과 발목에 채워진 착고에 의해 으스러지는 고통을 그들은 무엇을 바라며 감내 했을까?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만물의 찌꺼기 같은 대접을 받으면서도 그토록 기뻐하며 살았는가? 엄청난 봉변과 고난을 한탄 대신 밤이 깊도록 기도하면서, 주님만을 의지하는 찬송을 불렀으니 과연 무엇이 그토록 바울과 실라로 하여금 불평과 원망으로부터 기도와 찬송을 하게 만들었을까?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죽이려고 합법적인 권리까지 취득하여 의기 당당하게 다메섹으로 향하던 바울의 발걸음은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단번에 고꾸라지고, 이제는 그와 반대로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되고 말았다.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다메섹의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면, 혈족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주님을 아는 지식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린다.”고 외치며, 일생을 통하여 한번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순교하던 그날까지 처음과 끝이 동일한 삶을 살았을까?

나는 지금 바울을 부러워한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바울의 이런 체험을 부러워한다. 영어(囹圄)의 몸이면서도 그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외치며 영혼의 자유를 부르짖었으니,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옥중서신을 읽을 때마다 숙연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봄을 타는지 요사이는 유난히 잠이 오질 않아 이 생각 저 생각 상념에 잠기다 보면 날이 훤히 밝아 온다. 이렇게 게으르고 나태하게 살다가 죽어야 하는가? 그러다 어느 날 홀연히 공중에 임하실 주님을 만나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될까?

빌립보 감옥에 매를 맞아 으스러진 뼈를 추슬러 가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던 바울과

나는 너무도 그 모양새가 다르다. 그래서 저 하늘에서는 각각 상급이 다른가 보다.

나도 부활의 아침에 부활의 소망으로 이겨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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